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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기동대가 체질이었던 사람
여전히 팬데믹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고 있던 2022년 2월, 나는 지구대를 떠나 경기 화성 서부경찰서에 위치한 3 기동대로 발령을 받았다. 시흥 집과는 상당히 멀어진 출퇴근 거리에 약간의 좌절을 한 상태이기도 했고, 또 지구대 같은 팀 형들이 기동대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을 하도 많이 해서 괜찮을까 걱정이 앞서긴 했지만, 지구대 근무 중에 겪었던 스트레스들이 상당했던 터라 당장은 안도했었다. 어떤 환경에 놓이든 간에 지구대의 교대 근무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짐작도 있었고, 팀 내에 나를 지겹도록 괴롭혔던 한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우선적으로 들었다. 아무튼, 그리 싫지만은 않은 발령이었다.
인사이동 간에 하필이면 코로나 유행이 다시 시작되어 버린 탓에, 출근 첫날에 기동대 팀원들과 제대로 된 인사도 나누지 못했었다. 코로나가 한차례 휩쓸고 가버려서 사무실은 휑하니 비어있었고, 총 6명의 인원이었어야 할 우리 팀 자리에는 나 포함해서 3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출근 이후에도 자차에서 대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출근과 동시에 카카오톡 메시지로 출근했음을 알린 뒤, 퇴근 시까지 차에서 무기한 대기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답답한 마음이 들기는 했으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구대에서 지칠 대로 지쳐있던 심신을 쉬어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며, 출근할 때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경찰관 기동대는 집회 시위 상황에 출동하여 시위자와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경비 부서이다. 원래는 의무경찰들, 그러니까 과거의 전투 경찰들이 주로 맡아서 하던 임무였지만, 의경 제도가 전격적으로 폐지됨에 따라 현직 경찰관 인력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임 순경들은 의무적으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기동대에서 반드시 근무해야만 했다. 마치, 군대를 두 번 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달까. 의경 출신의 순경들에게는 더욱이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코로나 시국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고 겨울을 지나 날이 따뜻해지면서 민주노총이나 각종 노조들이 쉬어왔던 집회 시위를 다시 시작해 갔다. 4월, 5월을 지나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그 시위의 빈도나 강도는 더욱이 거세어졌다. 우리는 방패를 들고 집회 시위자들과 뜨거운 여름날에 대치하거나 시간을 정해놓고 교대로 보초를 서거나 혹은 순찰을 돌거나 했다. 지구대와는 또 다른 고충이 있기는 했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장점으로 다가왔던 것은, 근무 간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기동대, 같은 제대 안에서 선후배가 나뉘기는 했지만, 다 같은 기동대원으로서 똑같이 방패를 들거나 순찰을 도는 근무를 해나갔다. 거기에는 특출한 능력이나 경험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그저 지시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단순 업무들의 연속이었기에 몸이 가끔 힘들 뿐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돌발 상황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기에 상명하복 체계는 군대만큼 명확했지만, 임무 자체의 난이도가 그와 같이 상당히 낮은 편이어서 서로 간에 얼굴을 붉힐 일도 좀처럼 없었다. 게다가, 매일같이 광화문 집회 시위나 근처 경비 업무를 서야 하는 서울청 기동대에 비해 경기남부경찰청 소속 기동대는 확실히 상황 출동 횟수가 훨씬 더 적은 편이어서 수월한 근무일이 많기도 했다. 집회나 시위가 없는 날이면, 출근한 뒤에 사무실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했으므로 나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1시간 이상 걸렸던 화성까지의 출퇴근 시간에 대한 불만도, 하반기 인사 때 시흥경찰서에 위치한 8 기동대로 옮겨오면서 깔끔하게 해소되었다. 나는 기본적인 기동대원으로서의 근무 생활을 이어감과 동시에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해나갈 수 있었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처음부터 입직과 동시에 퇴사를 생각했었던 나였다. 조카에게 어엿한 삼촌이 되기 위해 경찰이라는 직을 선택했을 뿐, 실질적으로 근무는 내가 인생 속에서 하고자 했던 것들은 아니었다. 나는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준비의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숨 가쁘게 정신없이 돌아갔던 지구대 근무 속에서는 좀처럼 꿈꾸지 못했었던 여가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미친 듯이 그 시간을 활용하여 미래를 그려나갔다. 잠시 잊고 지냈던 투자 공부를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했고, 다시금 책을 집어 들어 읽으면서 세상과 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틈틈이 블로그에도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면서 나름대로의 인생 계획들을 정립해 나갈 수가 있었다.
2022년도는 참으로 다사다난했었다. 2년 간 암투병을 이어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했고, 바쁘기만 했었던 지구대 근무를 내려놓고 기동대로 옮겨가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갈 수 있었던 나름대로 정신없는 해였다. 시간은 너무나 빨리 흘러가버려서 제대로 삶을 돌아볼 여유조차 주지 않는 매정함을 지니고 있다. 때로는 그런 매정함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슬픈 나날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마냥 미워할 수는 없는 매정함이다. 원래 성미가 슬픔에 잠겨 잠식당하기보다는 그런 슬픔들 속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 나아가려 하는 면들을 가지고 있기에, 22년의 여러 고난들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나아갈 수가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인생을 살다 보면 유난히 모진 나날들이 닥쳐올 때가 있다. 좋은 날들이 마냥 이어지지 않듯이 좋지 못한 나날들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런 사실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또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기에는 언젠가 맞닥뜨리게 될 세상 앞에 더욱더 단단해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하면 된다. 잠시 이런저런 일들에 좌절을 당할 때에도, 멈추어 서서 성찰하며 더 나은 능력을 길러내거나 아예 색다른 일들을 모색해 볼 수도 있다. 인생은, 짧은 순간의 숏츠나 단막극이라기보다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마라톤과도 같다. 언제나 위기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영광의 순간 역시도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어느 때이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해 볼 수가 있다. 나는 그런 인생이 참 좋다.
인생과 인생에 대한 숱한 고민들을 글로 풀어냅니다. 늘 사랑하는 인생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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