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언어 환경이 자폐스펙트럼장애(ASD) 아동의 주요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UCLA 헬스 연구진은 여러 언어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환경이 인지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연구팀은 7~12세 자폐 아동과 비자폐 아동 총 116명을 대상으로 다중언어 환경이 자녀의 집행기능(Executive Function, EF) 발달과 자폐 증상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자기 조절에 필수…집행기능이란?
집행기능은 억제력, 주의 전환, 작업 기억 등 고차원적인 인지 능력의 총합이다. 때문에 집행능력이 높으면 목표 달성을 위해 본능을 억제하거나, 빠르게 행동을 바꾸는 것 등이 손쉽다. 이처럼 집행기능은 자기조절 능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때문에 이 능력이 부족할 경우 학업이나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연구에서 다중언어 사용이 아동의 집행기능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집행기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자폐 아동에게 다중언어 환경이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연구진은 부모들에게 자녀의 집행기능 수준을 평가하도록 요청한 뒤, 다중언어 환경에서 자란 자폐 아동과 단일 언어 환경에서 자란 자폐 아동을 비교했다. 그 결과, 다중언어 환경에서 자란 자폐 아동은 주의 전환과 억제력에서 더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연구팀은 다중언어 사용이 목표 언어를 선택하고 비목표 언어를 억제하는 인지적 과정을 반복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집행기능이 자연스럽게 강화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말하는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한국어로 이야기 할 때는 영어가 튀어나오는 것을 막아야하며, 반대로 영어로 말할 때는 한국어 사용을 억제해야 한다.
다중언어 환경 발달지연 초래 안해…자폐 증상 완화에 도움
이번 조사에서는 다중언어 사용이 자폐 아동의 핵심 증상 완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다중언어 환경이 자폐 증상의 주요 세 가지 영역인 △관점 이해 능력 △사회적 의사소통 △제한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다중언어 사용은 타인의 언어와 문화적 차이를 자연스럽게 인식하도록 돕는다. 이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관점 이해 능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다중언어 환경에서는 상황에 따라 언어를 전환해야 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경험은 사회적 신호를 인지하고 대화 상황에 맞게 의사소통 전략을 조정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마지막으로 다중언어 사용은 억제력과 인지적 유연성을 강화해 자폐 아동이 특정 행동이나 주제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행동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다.
연구를 이끈 UCLA 뇌 연결성과 인지 연구소의 루시나 우딘 소장은 “다중언어 사용이 발달 지연을 초래할 것이라는 일부 부모들의 우려는 과장된 면이 있다”며 “가정에서 사용하는 모든 언어를 아이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자폐 아동의 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다중언어 사용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그렇지만 연구진은 이번 연구가 초기 단계에 있으며, 모든 자폐 아동에게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고 경고했다. 문화적, 언어적 배경에 따라 다중언어 환경의 효과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환경에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연구는 국제자폐연구학회(ISAR) 공식 학술지인 ‘자폐 연구(Autism Research)’에 게재됐다.
윤은숙 기자 sug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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