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힘과 열림: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에서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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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을 영화로 볼 수 있을까? 원론적으로는 ‘아니’라고 말해야겠지만, 이런 부류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아무래도 러닝타임이 긴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세계적으로 영화감독들이 OTT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는 경우가 늘어났을뿐더러, 전반적인 제작수준이 올라간 덕도 있다. 우선 영화를 찍는 장비를 드라마에도 그대로 가져다 쓰니 드라마가 영화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일상극이나 가정극 등이 주로 이루는 드라마 중에서는 그나마 사극 정도가 ‘억대’ 제작비를 소모하면서 ‘탈드라마’ 퀄리티를 냈었다. 여기엔 <대조영>, <태왕사신기>, <천추태후>처럼 방송사가 ‘각’을 잡고 만든 프로젝트성 드라마가 포함됐고 이는 곧 한 편의 드라마가 심혈을 기울일 정도의 상품이었던 적은 드물었다는 점을 뜻했다. 아니면 <아이리스>처럼 해외 로케이션이 많았던 작품을 떠올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와는 달리 드라마는 한 자본이 제작위원회로서 제작을 총괄하게 된다는 점에서 영화와 차이가 있었다. 투자로 이 둘을 구분하는 건 가볍게 딛고 넘어갈 만한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건 드라마는 실시간으로 티브이에서 무언가를 송출하는 방식에서 출발한 극의 한 형식이며, 이러한 점이 방송기술의 발달로 녹화방송이 가능해진 이후에도 줄곧 흔적으로서 존속해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드라마는 외부상황이나 시청자 반응 등을 보면서 각본을 수정하거나 편집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래서 각본이 무리하게 연장되기도 하고 올림픽 같은 기간에는 휴식기를 갖기도 하는데, 영화는 그게 불가능하다. 영화는 작품에 출연한 배우가 물의를 빚거나, 작품이 다루는 소재가 사회적으로 민감한 무언가라면 그대로 창고에 직행한다. 영화는 이미 완결된 형식으로 존재해왔다는 뜻이다. 다른 맥락이지만 “영화는 미래가 없는 매체”라는 초창기의 격언은 그런 뜻으로도 읽히는 감이 없지 않다. 미래라는 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무언가를 지칭하는 것이니 말이다. 영화는 이렇게 완결된 형식으로서 제시되었기에 그 미래를 상실했지만, 반대로 무언가에 사로잡히거나 감염될 우려도 없어서 항상 깨끗하고 청렴하게 남을 수 있었다. 드라마가 제작여건을 따라 퀄리티에 영향을 받았다면, 영화는 그런 외부요인이 개입될 수 없으니 내적으로 균등함을 유지했다. 학술적으로 분류하면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를 닫힘과 열림으로 지칭할 수 있는 가운데, 영화는 드라마에 비하면 외부의 영향이 더 적으므로 더 위생적이었다. ‘위생’이라는 말이 꼭 ‘무결’하다는 점을 뜻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둘 중 뭐가 더 먹기 좋아 보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전자일 것이다. 확장가능성과 종결의 서사를 잃어버린 것은 영화였다. 


OTT 드라마의 성장은 한편으로 판데믹 시기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OTT 플랫폼이 한 작품을 몰아보기에 편리한 구성을 했다는 점에 귀인하기도 한다. 열림보다는 닫힘에 가까웠던 시기, 끝의 형식을 갖고서 확정된 미래로 나아가는 이들 드라마는 대중에게 탈출구 역할을 해주었다. 영화가 한 번의 폭발로 끝나버리는 현상에 불과했다면, 드라마는 명멸하는 불빛이 되어 반딧불의 잔존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판데믹과 위생은 서로 다른 맥운에서 발흥하지만 그럼에도 맥락적으로는 무언가 동요하는 면이 있다. 우선 판데믹 시기의 ‘감금’은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라는 뜻에서의 자기감금이기도 했는데, 알다시피 이는 푸코의 개념을 떠올리게 해서 무언가 수도적인 느낌을 준다. 위생을 철저히 하는 일이 자기배려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병균을 검역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영화를 일종의 면역체계에 빗대었다. 영화를 보는 상태에서 관객은 그 자신을 외부와 격리하게 된다. 동시에 영화는 내부도 외부도 아닌 어느 사이가 됨으로써 서로 간에 압력 차를 견고히 유지하는 격벽이 된다. 영화는 더는 현실이 될 수도 없고, 현실을 끝낼 수도 없게 됐다. 단지 자기감금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다. <오징어게임>은 그런 뜻에서 영화인 듯 보인다. 특이한 상황이면서도 모호하게 현실적인 이 작품에서, 생존은 자본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끝낼 수 없다고 말하는 많은 의견이 있다. 언젠가 소련이 무너지던 때처럼, 자본주의 붕괴를 논하는 건 그게 갑작스레 무너지고 나서 조금은 시간이 흐른 때가 될 테다. 하지만 지금에는 그 게임이 언제 끝날지를 알 수 없으므로 자본주의의 끝을 생각하는 일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오징어게임>이 말하는 것은 정확히 그와 같다. 성기훈이 게임을 무너트리려 하는 건, 오징어게임의 승리자가 됨으로써 그에 따른 상징적 질서와 체제를 벗어날 수 없게 된 상황이 도리어 오징어게임의 바깥을 생각해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프론트맨이 과거에 성기훈처럼 오징어게임에 반대했었고, 어떤 일을 계기로 마음을 돌렸다면 <오징어게임>은 프론트맨이 성기훈에 작은 희망을 거는 이야기가 될 테다. 시즌2의 마지막 장면은 “어쩌면 아직 이 체제를 되돌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프론트맨이 성기훈에게 모종의 기대를 거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은 그가 성기훈에게 ‘실망했다’고 보는 쪽이겠지만, 적어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상상하고 이를 의견으로서 제시했다는 점에서 성기훈의 모습은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정말로 희망이 없는 것은 그곳에 더는 확장 가능한 상상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좀 전에 했던 문장의 앞뒤를 뒤집어보려 한다.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으로 고점을 찍은 한국영화는 판데믹의 충격을 완화하지 못한 채 판데믹 이후를 마주했다. 모두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잘 알지만, 반대로 어디에 가야 이 충격을 끝낼 수 있을지를 알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영화가 고점을 찍은 이래로 더는 앞으로 나아갈 공간이 없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의 가능한 상상 영역이 줄어든 지금, 영화는 미래가 없는 매체가 되었으며 반대로 미래가 없는 현실에 바로 그 영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영화를 비평하는 일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현대사회의 ‘유동’과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빠른 해고와 고용을 통한 유연화는, 영화의 한 면을 우직하게 지지하기보다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하거나 옹호할 수도 있도록 준비된 젊은 비평가의 ‘태세’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품이 된 개인과 마찬가지로, 상품이 된 담론은 어용언론에 의해 쉽게 고용되거나 해고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느 하나를 뚝심있게 지지하기란 어려운 선택이 된다. 심지어 오늘날의 비평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게 순식간에 몰락과 부활을 반복하기 때문에 반대로 자신을 지키는 쪽을 택하기도 한다. 자기애가 강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야말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론이 쇠락세라던가 하는 식의 이야기에는 그렇게까지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젊은 비평가는 담론 지층의 유동화에 대항해서 언제라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을 건축물을 짓기보다, 얇고 가볍게 만들어져 지진과 같은 재해에 대비할 수 있는 집을 짓는 것처럼 보인다. 나쁘게 말하면, 영화평론가가 영화를 믿지 않는 건 문제일 게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평론가가 영화를 믿지 않는다면 누가 그걸 믿겠는가? 더 큰 문제는 비단 담론을 형성하는 일만이 아니라 비평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일에도 그것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이다. 젊은 비평가는 자신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점에 자신이 없다. 시네필의 흔한 고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칼을 들어 싸워야 할 사람이 정작 칼에 베이기를 두려워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오늘날 젊은 비평가는 담론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젊은 비평가는 여기저기 관심 있는 게 많아서 넓고 얇은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점이 영화평론가의 정체성이 영화에만 국한하지 않고서 다른 분야에 발을 걸치는 게 아닌지를 의심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없거나 그릇이 모자란다고 보기보다는, 우리가 비평가를 바라보는 접근법 자체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분열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젊은 비평가의 존재 자체가 허황된 건 아닐까? 


티브이 드라마는 영화와 뚜렷이 구분되는 지점이 정말로 많았다. 서점에 가서 작법서를 구입하더라도 영화와 드라마는 서로를 명확히 구분짓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OTT의 ‘드라마’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OTT 드라마는 드라마의 퀄리티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즌제로 제작해 방영했던 고자본 드라마의 맥운에 계보가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영화’라고 지칭할 수만도 없는 게 사실이다. 단지 판데믹 이후 영화에서, ‘끝’의 의미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는 대멸종의 시대가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이 머무는 곳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내부’로 수축하려는 시도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평론가란 어떤 존재일지를 생각하면, 고민에 대한 답은 항상 하나로 귀결되는 듯하다. <오징어게임>처럼 OTT 플랫폼에서 제작된 드라마는 실질적으로 영화에 더 가깝다. OTT 드라마의 분절된 형식은 인터미션을 갖는 연극과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으며, 단지 여러 번의 나눔이 있을 뿐인 영화다. 이들 영화는 말 그대로 감각적인 것을 관중에게 ‘분배’했다. 젊은 비평가의 모습과 OTT 드라마에 대한 구분짓기는 결국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하기보다 확인되는 거짓으로 자신을 몰아넣는 일이다. 그들은 중요한 건 싸우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싸우지 않는다는 게 패배를 뜻하는 건 아니라고 말이다. 

참치는 숲속에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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