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18…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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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미키 17(2025)

(스포일러 있음)

서점 이벤트 당첨으로 GV까지 있는 시사회를 다녀왔다. 책을 많이 (좀 많이) 본 보람이 있군. 아직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화에 굳이 스포일러를 해 가며 리뷰를 하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심지어 좋은 리뷰들도 많다. (물론 개중에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바를 말하기 위해서 적당한 영화를 재료로 삼았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 아니냐?) 게다가 내 뒷자리에 앉은 남자 두 사람이 영화 시작 전부터 GV까지 내내 중얼거리며 온갖 아는 척을 다 해대서 귓동냥으로 들을만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 진심은 아닌데 감사하고, 가능하면 다음엔 다른 자리에서 좀 떠들었으면 좋겠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인데 잰 체하느라 오래 애쓰더라. 그리고 어지간하면 남 비난은 카페에서 소음으로 서로를 차폐하는 공간에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내는 그냥 재료(배우와 세트와 자본)가 외국 것일 뿐 완전히 봉준호 스타일의 영화라고 했는데 나는 절반만 동의했다. ‘할리우드’ 봉준호 스타일의 영화라고 생각했으니까. <마더>라든지 <기생충>, <살인의 추억> 보다는 <설국열차>, <옥자>의 연장선에 있는 영화, 그러니까 영화의 모든 페이소스는 전부 한국인의 밑바닥에서 끌어올렸는데 그 표현 재료가 외국 재료인 영화.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김치를 만드는데 배추 대신 양배추를 쓰거나, 무 대신 비트를 쓰는. 먹어보면 맛이 김치가 아닌 건 아닌데, 그 재료들의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우리가 아는 그 김치는 아닌. 한데 문제는 예전엔 현지 재료를 가지고 김치를 만드는 게 김치의 ‘현지화’라고 칭찬을 받았던 때가 있다면, 요즘엔 그냥 ‘한국 고유의 김치’를 먹는 게 유행인 시대라는 것. 하지만 한국 재료는 비싸고 시장도 크지 않아서 현지화된 김치가 아니면 투자도 소비도 없다는 게 여전히 문제라는 거고… 이 미스매칭이 3 연속으로 이루어진 것 같긴 한데 이게 막 전작보다 더 낫냐 하면 잘 모르겠는 그런 거다.

재미가 없냐? 그건 아니다. 마크 러팔로의 대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극단적 표현(단 하나, 최고, 가장 큰, 끔찍한 등등…)과 어벙한 말뽄새는 그… 대통령’들’을 계속 상기시키는데 그걸 러팔로의 얼굴로 볼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웃겼고, 그 지지자들의 빨간 모자… 도 너무 적나라해서 웃겼다. 오무 그 자체의 고화질 재현인 크리쳐는 징그러운데 귀여워서 감독의 괴물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로버트 패틴슨을 데려다가 지질함과 폭력성을 동시에 연기하게 만들어서 그거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사실상 러팔로-패틴슨-토리 콜렛의 140분짜리 연기차력쇼다), 소설의 내용을 시각화하는 것도 과하지 않았다. 거의 신내림 수준인 장면들도… (이 장면들이 모두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촬영이 끝났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장점이야 이미 다 보고 온 사람이 200만인데… 더 써야 할까?

주제의식도 나쁘지 않다.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어쩌면 자신일 수 있다. (자신의 죄책감을 마지막에 떨쳐버리는 기념식이라든지) 평범한 사람들이 결국 위대한 결정을 내린다. (밑바닥 인생이 인류의 역사를 뒤바꾼다!) 쓰다 버리는 존재처럼 여겨지는 노동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눈에 띄고… (죽는 게 일인 사람도 죽음이 두렵고, 그럼에도 두려움을 무릅쓴 선택이 모두를 구하는 것이지) 주인공이 꼭 영웅이 되어야 한단 법도 없다는 것도 좋고, (다들 대통령 되시려고 하는데 그래봐야 남는 게 감옥이나 죽음 말고 뭔가요?) 마샬은 당신 마음속에서 언제고 다시 돌아온다는 무시무시한 예측도 섬뜩하고… (독재자의 귀환이 진짜 꿈인지 아닌지는 다음 주면 우리는 알게 됩니다…) 전개가 직선적이라 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봉준호 감독 작품이 너무 어렵다거나 의미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두렵다거나 하는 사람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고…(장점인가? 애매하네… 하지만 메시지 떠먹여 주는 것도 가끔은 필요하기 때문에…)

특히 나는 소스에 집착하는 모습이 좀 많은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생각해 보면 소스라는 건 원래의 형태를, 먹는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오로지 소스를 만든 사람만이 원래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설국열차>에서 단백질 블록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는 건 혁명이 발발한 이후였던 것처럼, 형체를 상실한 소스를 누군가에게 먹어보라 시키는 것은 권력자의 핵심적인 유희다. (뭐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핥을 수도 없다. 하지만 배고프면 어쩌겠어 먹어야지) 첫날 미키의 식사에 발라져 있던 그 소스는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마지막 미키가 찍어 먹으려 했던 그 소스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소스’는 영화 내내 일관되게 등장하고 그때마다 기묘한 불안감을 일으킨다. (뭐가 들어있는지 모르는 걸 먹은 미키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생각해 보라) 형체를 빼앗을 수 있는 힘, 그리하여 통제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사치품인 소스를 통해 보여주는 것만큼은 좋은 메타포이지 않나 생각했다. (이것도 결국 내 맘대로 생각이지마는) ‘미키 너는 영원히 모를 거야, 그것이 뭘로 만들어졌는지…’ 일파가 비릿한 웃음을 왜 지었겠나. 죽어도 나는 너보다 윗계급 사람이라는 거지. 넌 모르고, 난 아니까.

벽돌도 그렇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간결하게 제작 가능한 시대에 벽돌이라는 게 대체 뭔가. 가장 몰개성적인 재료에 가장 개인적인 정보를 저장하는 것만큼 역설적인 것도 없다. 게다가 버려도 티가 안 난다. 벽돌이야 한 두 개도 아닌데 몇 개 버린다고 티가 나겠는가. 오히려 너무 예쁘게 디자인해 두면 버리기에 아깝기도 하고, 고유성까지 느껴지니 쉽게 버릴 수도 없지. 이미 어느 정도는 멀티플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비상 상황에서 미련 없이 버릴만한 모양으로는 벽돌만 한 것도 없는 것이다. 건축의 기초 재료로서 안 쓰이는 데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부서지면 내버리고 똑같은 다른 벽돌로 채워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익스펜더블의 처지가 곧 벽돌이지 않나. 그들의 개성이나 개인적인 기록마저도 집주인이 보기엔 한낱 소모품 사이의 소소한 표면 차이 정도에 불과하니. 가끔씩 헷갈리지 않는 게 다행일 텐데. 그런 디테일한 메타포들이 장치로 드러나는 부분들 (네 번의 빨간 버튼이라든지, 세 번까지는 명확한데 네 번째는 모호하다)은 여전히 재미있는 상상을 가능케 해 줬다.

근데 뭐랄까, 메타포는 많은데 그걸 설득력 있게 서사화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인 거라고 생각했다. 일곱 번 죽으나 열일곱 번 죽으나 하층 계급의 인간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린다는 건 별로 큰 차이가 아니고, 실제로 영화에서 드러나는 수준으로 16까지의 죽음을 표현할 거라면 그냥 6번의 죽음만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거랑 뭐가 달랐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의도했던 거라면 그게 매번 영화 평론가들이나 감독의 인터뷰로서만 드러날 수 있는 장치에 가까워 보여서 서사에 제대로 녹아들지 않았던 것 같고. 게다가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꼭 거대한 비용을 들여서 SF적 장치로만 설명 가능한 무엇도 아니고… (인간을 기계 부품처럼 쓰다 버리는 것의 비정함에 대해서라면 굳이 복제인간까지 나갈 필요도 없이 <해야 할 일>이나 <다음 소희>를 봐도 되는 것 아닌가?) 쫄리게 만들라면 멀티플 상황을 더 오래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건 또 휘뚜루마뚜루 끝나고. 할리우드 영화가 대자본을 회수하는 안전한 선택을 하는 방법에 잘 적응한 결과라고 봐야 할까?

<기생충>에는 ‘계급투쟁’이 상실된 후 비슷한 하층 계급끼리의 목적 없는 투쟁의 비극이 저택의 숨겨진 지하실을 배경으로 벌어진다는 독특함이 있었고, <설국열차>에서는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 같았던 저항이 사실은 정기적인 시스템 리셋의 방법이었으며 이를 해소하려면 시스템 자체를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끝없이 달리는 열차를 배경으로 삼는다는 독특함이 있었다. 그런데 <미키 17>에는 어떤 독특함이 있을까? 이름 없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연대,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이 압제와 뒤틀린 시스템을 개선시키리라는 희망적인 서사를 SF를 통해서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봉준호 감독은 현실과 비슷하지만 어딘가 살짝 어긋나 있는 가상의 공간들을 창출해 내고 그 안에서의 인물들의 행동에 납득할만한 합리성을 부여하는 데 탁월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미키 17>에서 창출해 낸 공간은 그 탁월함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물들의 행동이나 발화의 동기가 완전히 한국적이지도 혹은 완전히 미국적이지도 않다 보니까 가상공간이 그러한 어색함을 어떻게든 해소시키기 위해 소환하는 장치가 되어 덜컥거리고 있는 거 아니냐는… (그러니까 introvert가 앞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농담을 한국 사람들만큼이나 외국 사람들도 웃기다고 받아들일까? 그런데 그걸 외국인의 입으로 듣는 순간 한국 사람들마저도 웃을 수 있을까?) 뭔가 그전까지는 그가 창조한 공간이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었다면,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는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여성 캐릭터 둘의 행동은 사실 잘 이해가 안 된다. 애초에 서사를 잘 설명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만찬 자리에서 미키에게 마샬이 행한 것에 대해 항의하다가 갑작스럽게 또 말을 듣다가, 다시 또 미키를 보호하는 그 상황을 보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전혀 설명이 없는데, 혼란스러운 행태를 보여줄 거면 좀 그전에 성격이라도 좀 제대로 보여줬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나샤의 경우도 마찬가지. 전체 극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맡는데, 오히려 이쪽은 너무 평면적인 캐릭터라서 나중 되면 ‘오 중요한 역할을 하시겠군…’ 하고 심드렁해지는 순간이 있다. 원작을 보면 해결이 되나? 근데 그렇게 이해가 되어버리면 영화가 잘못한 거 아닌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뒤섞여 있지만, 이 시국에 영화관에 간 것이 아깝지는 않았단 생각이고… 다만 봉준호 감독에게 기대하는 바에 따라선 평가가 갈릴 것 같은 그런 영화. 재밌으면 재밌을 이유가 있을 만하고, 재미없으면 재미없을만한 이유가 있을 것. 반반 느낌. (영화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준 건 좀 나랑 의견이 다른 거 같지만 그것도 그럴만한 이유는 있어 보이고) 어쨌든 요즘처럼 영화관에 가고 싶었던 적이 언제였더라. 영화관에 일단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것만큼은 확실한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 보고 나서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졌으면 그건 또 나름 성공한 영화의 지표가 아닌가… 아닌가? 그나저나 어서 <콘클라베>를 보러 가야 하는데. 그건 그거대로 또 엄청 할 말이 많을 거 같은데.

아 그런데 나는 미키 몇 쯤 되는 건가. 18? 이번이 몇 번째 죽음인지 모르겠네. 적어도 수천만 번은 되는 것 같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미키 XX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세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이젠 모르겠지만.

방송국에서 12년째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최근 <오학준의 주변>을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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