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션 베이커 –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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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어서 다행이었다, 
SNS에 온통 아노라 얘기뿐이었다. 아노라가 개봉한 지는 조금 됐지만 개봉관이 적은 탓에 볼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요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것에 재미가 들린 터라 애무 시네마에서 마침 상영을 하고 있길래 얼른 예매해서 보고 왔다. 
특히 외국에서 하도 아노라에 대한 반응이 뜨겁기도 했고 게다가 다른 배우들도 영화 뿐만 아니라 아노라의 주연 배우인 미키(마이키?)매디슨에 열광하길래 얼른 나도 그 대열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감독 션 베이커가 만든 영화니 
기대감은 더 높아졌다. 

영화의 초반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겠지만 곧 바로 영화 <귀여운 여인>이 떠올랐다. 
남자를 상대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애니, 
아니 아노라(미키 매디슨). 그녀의 본명은 아노라지만 애니로 불리기를 영화 내내 한사코 거부한다.  
하지만 귀여운 여인에서처럼 해피해피 엔딩으로 가지 않을 거란 건 이미 눈치를 챘다. 
특히 이반이 침대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소개하며 애니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불안함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래도 3막 구성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영화에서 2막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둘은 열렬히 사랑하는 듯 보였고 나도 두가지 옵션을 생각했다. 이반이 예상을 깨고 정말 이 관계에 진심이던가, 아니던가. 
사실 내 예상은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삶 안에서 사무치게 외로운 두 사람이 만나 플롯이 진행되려나 했지만, 내가 너무 순수했다. 상류층으로 구분되는 이반은 역시 철 없는 개차반이었고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자 애니를 두고 도망쳐 버린다. 

그리고 2막은 애니와 이반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고 있는 러시아 깡패(?)들이 이반을 찾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물론,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그 때까지도 애니는 굳게 자신에게 향한 이반의 사랑을 믿고 있다. 
애니가 정말로 이반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려고 이반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2막에선 이반보다 더 중요한, 진짜 주인공이 나온다. 애니 뒤를 항상 지키고 있는 이고르(유리 보리소프).아니, 아노라 뒤를 항상 지키고 있는 이고르. 
2막의 시작에서 그 누구보다 애니를 조심스럽게 다뤄주고 뒤에서 묵묵히 지켜 보고 있는 그는 말이 없다. 
항상 애니의 뒤를 쫓는 그의 눈은 왠지 모르게 슬프고 처연하다. 난 영화의 끝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2막의 초반에 두 사람이 함께 쇼파에 망연하게 앉아 있을 때부터 둘의 모습에서 난 서글픔을 느꼈다. 
결국은 제일 비슷한 두 사람이어서 였을까. 애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산전수전 끝에 이반을 찾아냈고 애니는 결국 이반에게 버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니의 곁을 지켜주고 애니의 존엄성을 지켜준 사람은 역시 이고르였다. 
스포일러라 자세히 말하진 않았지만 그 2일간의 소동을 겪고 난 후 결국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애니, 아니 아노라. 
하지만 이고르의 차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이고르가 건네준 그 무엇에 고마움을 느낀 그녀였지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남자들에겐 잠자리를 해주는 것만이 보답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긴 말 하지 않고 그의 위에 올라타 관계를 시작하려 했던 애니는 뜻밖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다. 
진심이 담겨 있는 그의 눈을,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려는 그의 손을, 그녀와 입술을 맞추려는 그를. 
그 순간 애니는 아노라가 되었고 아노라는 이고르의 품에 쓰러져 운다. 

보통 (좋은)일본 영화들에서 내가 발견한 특징이라 하면,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관객을 영화의 내러티브 안으로 끌어들여 관객들을 잠시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선 영화의 끝에 예상치 못했던 보따리를 하나 툭 던져주는데(이때 툭이 포인트다. 무심하게 툭,) 그 보따리란 게 영화의 전체 흐름을 완벽하게 갈무리 해줌과 동시에 등장인물들의 그간 행동과 감정을 납득 시켜주는 터라 나같은 관객들을 펑펑 울게 하는 것.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보면 후유증이 꽤 있다. 예상치 못한 어퍼컷을 맞은 후라 그런가. 
그러나 이런 특징들은 동양 영화에서는 봤어도 서양 영화에선 이런 류의 어퍼컷은 당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보통 외국 영화들은 조금 더 서늘함에 가깝다면 가까웠는데 이번 아노라에서 난 오랜만에 이 감정을 느꼈다. 마지막 아노라가 이고르의 품에 푹 하고 쓰러져 엉엉 울기 시작하자마자 내 눈물보가 펑 하고 터졌다. 한낱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오로지 아노라의 눈물로만 설명될 수 있는 무언가가 나에게 와 닿았기 때문에. 

사실 전체적으로 봤을 땐 난 아노라보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좀 더 좋았다. 
따지고 보면 아노라의 기본 줄거리는 특별한 것이 없는데다가 이동진 평론가님께서는 2막을 아노라와 일행들의 여정으로 구성할 거라고 사람들이 잘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고 했지만 나에겐 너무 당연한 흐름이어서 크게 유니크함도 느끼지 못했다. 
이고르가 등장했을 때부터 난 왠지 모르게 이 이야기는 아노라와 이반의 이야기가 아닐 거란 걸 직감해선지 몰라도 구성 자체에도 별다른 걸 느끼지 못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션 베이커 영화에서 항상 묻어나는 따뜻한 시선이 좋고 유머가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아노라>에서 가장 컸던건 역시 마지막이었고 눈 소복히 내리는 날 차 안에서 흐느끼는 아노라의 모습에서 오는 묵직함은 거의 완벽한 마무리였다. 

그리고, 난 아노라와 이고르가 그 이후로 영영 서로를 만나지 않았기를 바란다. 
단지 그 날 나눈 따뜻함으로 결국은 또 살아나가야 할 각자의 삶에 가끔씩은 등대가 되어주기만을 바라며.

 

이제서야 뭔가 이것저것 만져보고 시도해보는 중인, 영국 박사 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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