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랑과 이념의 갈등
[영화로 보는 인간의 마음]
2007년 대만 영화감독 이안(李安)의 <색,계>(色,戒)가 2005년 1월 1일 한국에서 재개봉한다. 영화는 전시 상하이와 홍콩을 배경으로 인간 심리를 깊이 탐구한 작품이다. 그러나 처음 개봉했을 때, 주인공의 신체 노출과 수위 높은 베드신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작품의 진정한 면목이 가려 버렸다. 재개봉은 사랑, 성, 배신, 정체성, 도덕적 모호성이라는 주제를 영화가 어떻게 파헤치는지 관객이 다시 주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영화의 핵심은 <색,계>(色,戒)라는 제목에 잘 나타난다. 색(色)은 성적 욕망이나 사랑이다. 계(戒)는 주의하고 조심한다는 뜻이라기보다, 행동의 규범이나 사명을 가리킨다. 영화의 플롯은 바로 색(色)과 계(戒)의 갈등, 즉 사랑과 이념 사이의 충돌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심리를 전개한다. <색, 계>의 영어 제목은 “Lust, Caution”인데, 이것은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색(色)을 성적 갈망을 의미하는 Lust로 옮긴 것은 적절하지만, 계(戒)를 조심이라는 의미의 Caution으로 옮긴 것은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성적 갈망과 통제 사이의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니라, 성적 갈망과 이념의 충돌을 겪는 개인의 심리적 과정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동력
여자 주인공 왕가지(王佳芝)는 지금 한국에서 활동하는 탕웨이(湯唯)가 연기한다. 왕가지는 홍콩의 링난대학(嶺南大學)의 1학년 학생이다. 실제로 이 대학은 원래 중국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에 설립되었는데, 중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광저우를 함락하자, 1938년 홍콩으로 이전했다. 왕가지도 전란을 피해 홍콩으로 갔다.
왕가지가 사랑하는 남자는 광유민(鄺裕民)과 이묵성(易默成), 두 사람이다. 왕리홍(王力宏)이 연기하는 광유민은 성관계를 아직 경험하지 못한 순진한 대학생이고, 양조위(梁朝偉)가 연기하는 이묵성은 일본의 괴뢰 정부 고위 관리이며 중년의 유부남이다. 당신이 여대생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어느날 대학 캠퍼스에서 광유민은 왕가지와 그녀의 친구에게 연극부를 새로 만든다면서, 오디션을 보라고 권유한다. “우리는 애국적 연극을 만들어 저항을 위한 자금을 모을 계획이야. 우리 군인들은 전선에서 생명을 걸고 일본과 싸우고 있는데, 홍콩에 사는 사람들은 계속 놀고 먹고 있어. 우리는 연극으로 그들을 일깨워야 해.” 광유민은 잘 생겼고, 애국적 열정에 가득차 있었다. 왕가지는 그런 매력에 빠져 연극반에 들어가 애국적 작품을 그와 함께 만들고 공연한다.
중일 전쟁 당시 일본은 중국의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친일 괴뢰 정권을 세웠는데, 이묵성(易默成)은 그 정부의 고위 관리이다. 이묵성은 부역자(附逆者)인 것이다. 그가 홍콩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연극부의 리더인 광유민이 그 매국노를 암살하자고 제안한다. 왕가지는 애국심 때문에서가 아니라 광유민에 대한 사랑 때문에 거사에 적극 참여한다. 광유민은 왕가지를 사업가의 부인(막 부인)으로 위장하고 이묵성 부부에게 접근하여. 이묵성을 유혹하도록 한다. 이묵성은 왕가지의 청춘과 미모, 그리고 성적 결핍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눈빛과 입술에 빠져들어 간다. 그러나 암살의 결정적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이묵성은 상하이로 떠나버린다.
3년 후 왕가지는 상하이로 이주하여 다시 학교에 다닌다. 그녀가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광유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국민당 정보부의 비밀 요원이 되어 연극반 친구들과 함께 이묵성의 암살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왕가지는 여전히 광유민을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희망대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임무에 동참하기로 결심한다. 왕가지는 우연히 호텔에서 이묵성의 부인을 마주치는 것처럼 꾸미고, 그의 집에서 거주하며 이묵성을 유혹한다.
사랑과 성의 연관
사랑과 성의 관계는 복잡하다. 둘은 서로 다르지만 깊이 얽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랑과 성은 동일한 신경 화학 물질을 활동하게 하는데, 그것은 옥시토신과 도파민이다. 옥시토신은 신뢰와 공감의 레벨을 올려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이 때문에 연결 호르론(bonding hormone)이라고 불리고, 안거나 키스하는 등 성적 활동을 하는 동안 분출하기 때문에 사랑 호르몬(love hormone)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은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목표에 도달하거나, 재미있는 활동을 할 때 분비되어 즐거움을 느끼게 하여, 개인이 그런 활동을 하도록 유도한다. 많은 문화에서 사랑과 성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두 활동에서 비슷한 신경화학물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과 성은 서로 구별된 활동이다. 사랑 없는 섹스 즉 정서적 유대 없는 성관계는 자주 일어난다. 왕가지는 이묵성을 유혹하여 두 사람은 비밀스런 장소에서 첫 섹스를 나눈다. 남자는 혁대를 풀어 여자를 때리고, 여자의 두 팔을 묶고 매우 거칠게 삽입한다. 이런 강간 같은 섹스는 여자도 남자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자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묵성과 왕가지의 섹스는 점점 변해 간다. 남자는 폭력적으로 그리고 일방적으로 겁탈하듯이 섹스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여자의 쾌락도 고려하는 부드러운 성 활동으로 바꾸는 것이다. 왕가지는 처음에는 임무에 따라 성관계에 참여하였으나 거기서 쾌락을 얻게 되자, 섹스를 즐기게 된다.
섹스 없는 사랑도 가능한 일이다. 왕가지와 광유민은 서로 사랑하지만 섹스를 나누지 않는다. 나중에 광유민은 좋아하는 마음을 왕가지에게 내비친다. 왕가지는 빨리 이묵성을 제거하고 상하이를 강유민과 떠나고 싶었다. 광유민 역시 왕가지의 위험한 임무를 빨리 끝내도록 상관에게 건의했다. 그러나 새로운 임무가 부가되어 이묵성을 좀 더 살려 두자는 상관의 명령에 굴복했다. 자신의 연인도 지켜주지 못하는 광유민의 나약한 지위는 이묵성의 지배적 권력과 대조되어, 왕가지의 마음은 광유민으로부터 떠나게 된다.
사랑이 성관계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관계가 사랑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왕가지와 이묵성 사이에 성관계가 지속되면서 왕가지의 정체성이 변화한다. 남자를 유혹하려면 여자가 성적 매력만 있어서는 안되며, 여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인상을 남자에게 주어야 한다. 왕가지는 처음에는 이묵성을 좋아하는 척 연기하였지만, 연인의 연기에 충실하다 보니 정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질적으로 전환한다.
정체성과 역할 수행의 심리학
이제 정체성이라는 주제, 특히 개인의 진정한 자아와 그들이 수행해야 하는 역할 사이의 긴장이 영화의 주제로 부상한다. 왕가지의 진짜 정체는 광유민을 사랑하는 미혼의 젊은 대학생이지만, 막 부인(Mrs. Mak)으로 위장하여 이묵성을 사랑하는 척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왕가지와 이묵성의 성관계가 지속하면서 정체성의 이중성이 왕가지를 심리적 미로로 몰아넣는다. 막 부인으로서 이묵성을 사랑하는 그녀의 연기는 단순한 겉표지가 아니라, 현실과 속임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두 번째 피부가 된다. 그녀가 캐릭터에 오래 머물수록 그녀의 진정한 자아가 그녀의 역할 아래로 잠기게 된다. 이러한 이중성은 역할 흡입(role engulfment)으로 알려진 심리적 현상을 반영한다.
역할 흡입은 개인의 정체성이 그가 수행하는 특정한 역할에 의해 지배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개인의 자기-개념은 그가 차지하는 역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원래 지녔던 역할의 복합성을 줄인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환자”로 규정되면 그는 질병의 관점에서만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외 인격의 또 다른 측면을 무시한다. 사회나 집단은 개인에게 특정 역할을 요구하고, 개인이 그 역할과 연관된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인은 행동과 인간관계를 제한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교사에게 사회는 늘 모범적 자세와 교육의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에, 교사는 교육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경직된 자세로 타인을 자꾸 가르치려 한다.
왕가지는 이묵성을 사랑하는 척하는 유부녀의 역할을 광유민과 국민당 정보부로부터 부여받았다. 왕가지는 이묵성과의 성관계가 지속하자 그 역할이 왕가지의 정체성을 제한하여, 원래 자신의 정체성과 임무를 망각하게 된다. 섹스에서 왕가지가 얻는 쾌락이 증가하고, 그리고 이묵성이 그녀에게 점점더 친밀하게 대하는 태도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것들이 왕가지에게 역할 흡입의 촉매제가 된다.
왕가지는 자신이 수행하는 역할이 자신을 먹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광유민과 그의 상관에게 경고한다. “어떤 덫을 당신은 거론하는가? 누가 누구의 덫에 빠지는가? 이묵성은 내 몸속으로 들어올뿐 아니라, 내 심장으로 깊게 들어와 나를 갉아 먹는다. 마치 뱀처럼.” 이렇게 위험을 알려주는데도 국민당 정보부는 왕가지가 역할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왕가지는 거기에 동의하지만 자신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절망적 항변으로 표출한다. 보석상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이묵성이 왕가지에게 선물할 때 그녀는 이묵성에게 도망하라고 말하며 암살의 음모를 알려준다. 이 순간 역할 흡입은 최고조에 달하여, 왕가지의 정체성은 정말로 이묵성을 사랑하는 진짜 연인이 되어버린다.
도덕적 모호성(Moral Ambiguity)과 정서적 불협화(Emotional Dissonance)
<색,계>의 심리적 긴장은 내러티브에 스며드는 도덕적 모호성으로 인해 고조된다. 도덕적 모호성은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명확한 구별을 결여하는 상황, 결정, 성격 등을 지적한다. 이런 경우는 주로 윤리적 원칙이 서로 충돌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친구에 대한 의리와 사회에 대한 공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기 어렵다. 왕가지의 상황도 그러하다. 조국을 위해 봉사하려는 왕가지의 초기 결심은 이것과 상충되는 감정으로 인해 점차 침식된다. 저항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은 이묵성에 대한 커져가는 애정과 얽혀 심오한 감정적 불협화음을 만들어낸다. 종종 인지 불협화(cognitive dissonance)로 묘사되는 이러한 심리적 상태는 그녀가 의무와 사랑이라는 모순된 요구와 씨름하도록 강요한다.
도덕적 모호성의 클라이맥스는 왕가지가 이묵성에게 암살 음모를 알려주기로 결정하는 순간이다. 그녀의 결정은 감정과 사명을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에 감정에 굴복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이묵성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생명뿐만 아니라 동지에 대한 충성도 희생한다.
영화 <색, 계>는 단순한 멜로물이나 에로물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깊이 파고드는 심리적 역작이다. 정체성, 권력, 도덕적 모호성, 욕망과 배신의 상호 작용에 대한 탐험을 통해 이 영화는 역사적 사명과 개인적 감정의 교차에 휘말린 개인들의 잊을 수 없는 초상화를 보여준다. 이안 감독은 인간 심리의 복잡한 층위를 능숙하게 포착하여 왕가지, 이묵성, 광유민의 이야기를 인간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인상적 연구로 만든다.
철학을 공부하며, 에세이를 씁니다. 유튜브 채널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을 운영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