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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화와 해체의 역설: 영화 서브스턴스가 말하는 현대 주체의 초상
영화 서브스턴스는 현대 사회에서 주체의 형성과 분열, 그리고 그로 인한 자기 해체 과정을 치열하게 드러낸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상징적 이미지들—계란 노른자, 약물 병, 핑크색 비키니, 그리고 꿰맨 자국이 있는 등, 그리고 닭다리는 영화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압축하여 보여준다. 이 오브제들은 주체가 외부 구조와 내면화된 권력 간의 긴장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해체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영화는 이것들을 통해 현대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한다.
19세기 그로테스크에서 고어로: 인간 소외와 내부의 균열
19세기의 그로테스크는 인간 소외를 외부적 충격으로 드러냈다. 혐오스럽고 기괴한 형상들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압력 아래 인간이 외부 세계로부터 소외되고 그 존재가 분리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이는 인간이 환경 속에서 객체화되며 스스로와 단절되는 경험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현대는 그러하지 않다. 이미 그 구조가 내부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이 충격을 내부의 균열로 전환시킨다. 이제 문제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그 외부 구조가 우리 내부로 침투하며 생긴 자기 해체와 내면적 균열이다. 이제는 나와 싸워야 하는 전쟁이며 이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영화는 이러한 전환을 고어(gore)라는 잔혹한 형식으로 표현한다. 고어는 신체적 해체를 넘어, 주체의 내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서브스턴스의 고어적 연출은 현대 주체가 내면화한 구조와의 충돌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해체하고 파괴하는 과정을 극적으로 드러낸다. 계란 노른자의 분화에서부터 꿰맨 자국이 남은 신체에 이르기까지, 혹은 닭다리를 집어 삼키고 다시 몸속에서 꺼내는 장면까지 이 영화는 외부적 충격에서 내부적 균열로 전환된 현대적 공포를 미친 듯이 보여준다.
오브제(Object)
계란 노른자: 가능성과 취약성: 둘은 하나이다. 균형을 지켜야 한다.
포스터에서 가장 주목할 이미지는 계란 노른자다. 계란은 생명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깨지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에서 이 이미지는 주체의 형성과 분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새로운 생명 혹은 존재의 가능성이 자기 파괴적 측면과 맞물려 있음을 암시한다. 노른자는 비고츠키의 발생-구조-기능 개념과 맞닿아 있다. 비고츠키는 인간 발달을 내적 성숙으로 보지 않고, 외부적 요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복합적 과정으로 이해했다. 발달은 결코 선형적이거나 미리 결정된 과정이 아니라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역동적 과정인 것이다. 포스터 속 계란은 그 가능성과 취약성을 모두 시각적으로 압축해서 보여준다.
특히 영화 초반,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계란 노른자의 분화 장면은 주체의 형성과 파괴를 상징한다. 이 장면은 인간 존재가 끊임없이 분화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지만, 그 과정에서 내면화된 구조에 의해 스스로를 공격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비고츠키가 강조한 인간 발달의 이중성—가능성과 취약성의 공존—을 상징적으로 구현한다.
약물 병: 권력의 내면화
포스터에 등장하는 약물 서브스턴스는 권력의 내면화를 상징하는 핵심 오브제이다. 약물 병은 푸코의 생명정치와 규율 권력을 떠올리게 한다. 푸코는 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더 이상 외부적 억압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스스로를 감시하고 통제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약물 ‘서브스턴스’는 바로 이러한 권력의 내면화를 상징한다. 영화 속 약물 서브스턴스는 구조가 주체 내부로 침투해, 주체 스스로를 분열시키고 공격하도록 만드는 잔혹한 메커니즘의 기제로 작동된다. 주사 바늘을 통해 들어온 약물은 몸 속 깊숙히 파고들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동시에 주체를 붕괴시키는 양날의 검으로 표현된다.
비키니: 외부 규범의 내면화
포스터 속 핑크색 비키니는 사회적 규범과 외부 구조의 상징이다. 비키니는 몸의 외형을 규정하는 사회적 기준을 드러내며, 이는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의 작동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에서 비키니는 주체가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왜곡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좀 더 나은 나, 좀 더 날씬한 나, 좀 더 젊은 나, 바바라 크루거의 작품처럼 우리의 몸은 전쟁터가 되어간다.
현대 주체가 외부에서 끊임없이 부여되는 규범(비키니로 상징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면화하고, 약물처럼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조작하며 그 구조를 재생산과 함께 통제하는 과정을 비유한다.
꿰맨 자국: 해체와 재구성
꿰맨 자국이 있는 등은 몸의 해체와 재구성 과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포스터 속 데미 무어의 등은 둥근 원형 속에 꿰맨 자국이 드러나 있으며, 이는 몸이 단일한 실체가 아닌 분화와 해체가 반복되는 장임을 암시한다. 이것은 비고츠키의 개념에서 주체의 형성 과정이 단순히 내부적 성장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분화하며 새롭게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푸코의 관점에서 이것은 주체가 자신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내면적 권력의 기제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꿰맨 자국은 주체가 외부 구조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고통받고, 자기 자신을 파괴하면서도 다시 구성하려는 과정을 충격적으로 담아낸다.
닭다리: 소비와 소멸의 상징
포스터 속 닭다리는 생명과 소비, 그리고 소멸을 상징한다. 닭다리는 인간의 육체성과 식욕, 그리고 소비 행위를 드러내는 이미지로, 영화의 핵심 주제인 분화와 해체를 가장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닭다리는 단순한 음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분리되고 해체된 신체의 은유로써 현대 주체가 스스로를 파괴하며 외부적 규율과 내면화된 구조에 의해 소비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데미무어가 선물 받은 프랑스 요리책 그것을 보고 칠면조의 내장을 뜯어내고 바르고 토막내는 장면은 주체의 자기 공격을 보여주는 메타포로 상징된다.
또, 닭다리의 은유는 19세기 그로테스크와 현대 고어적 미학의 연결 지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그로테스크가 인간 소외를 외부적 충격으로 드러냈다면, 닭다리는 내부로 스며든 구조적 균열을 통해 현대 주체의 자기 파괴와 해체를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닭다리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체의 소멸과 재구성"이라는 역설적 메시지를 함축하며, 현대 사회에서 인간 존재가 어떻게 끊임없이 소비되고 소멸되며 다시 만들어지는지를 상징한다.
분화와 해체 속의 현대 주체
닭다리는 다른 포스터 속 이미지들—계란 노른자, 약물 병, 비키니, 꿰맨 자국—과 연결되며 현대 주체의 생존 방식을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로 묶어준다. 계란 노른자가 분화와 가능성을, 약물 병이 내면화된 구조와 권력을, 비키니가 외부 규범과 내면화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면, 닭다리는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소비와 소멸로 귀결됨을 직관적으로 상징한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닭다리를 통해 인간 존재가 생존을 목적으로 둔다거나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해체하며 외부적 구조에 의해 끊임없이 소비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닭다리는 곧 인간 존재가 어떻게 파편화되고 객체화되며, 동시에 그것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재구성되는지를 나타내는 강렬한 은유인 것이다.
19세기 그로테스크에서 현대 고어로: 충격의 전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19세기의 그로테스크가 인간 소외를 외부적 충격으로 드러냈다면, 영화 서브스턴스는 이 충격을 내부의 균열로 전환한다. 이제 문제는 외부 세계가 아니라, 그 외부 구조가 우리 내부로 침투하며 생긴 자기 해체와 내면적 균열이다. 닭다리는 그 충격의 상징으로, 현대 고어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인간의 신체성과 내부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고어적 표현은, 그로테스크가 외적 소외를 드러냈던 방식의 현대적 변형이자 극대화다.
내부 균열의 충격을 통해 질문을 던지다
영화 서브스턴스는 인간 존재가 외부 구조와 내면화된 권력 사이에서 분화되고 해체되는 과정을 치열하게 드러낸다. 계란, 약물 병, 비키니, 닭다리, 그리고 꿰맨 자국은 모두 현대 주체의 모순적 생존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주체 형성의 과정이 외부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된 구조와의 싸움이라는 더 복잡하고 잔혹한 양상을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영화는 우리의 현재를 묻는다. “Have you ever dreamt of a better version of yourself?” 더 나은 자신을 원하는가? "더 나은 자신"을 꿈꾸며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그 답은 명확하지 않다. 더 나은 가능성의 분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해체하는 위험을 동시에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브스턴스는 그 역설을 고어의 방식으로 파괴의 물질들을 스크린을 향해 뿜어낸다.
고어란 본질적으로 육체의 물질성을 극대화한다. 그것은 피, 살점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고어는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며 혐오와 공포라는 본능적 반응을 유도한다.
이 영화는 잔혹함을 통해 인간성을 탐구하고 파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질문을 제시한다.
그 기괴함 속에서 존재와 윤리의 경계를 묻는다. 우리는 피와 살점을 보며 외면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내속의 타자와 내면화 된 권력의 구조이다. 미학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미술, 영화,철학을 엮어, 사유를 감각해 보고 싶은 존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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