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완, 타이왕(몽골 이름), 호준(한국 가명), 호이준(몽골 가명). ‘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짧은 생애(32) 동안 여러개의 이름으로 불린 아이가 있었다. 한국에서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산 26년 동안 그를 압도한 감각은 ‘불안’과 ‘긴장’이었다. 그에게 어른이 되는 과정은 ‘나이를 먹는다고 말이 저절로 자라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말을 삼켜온 그가 지난달 8일 건설 중장비 사이에 끼였다 . 입에서 마음껏 꺼내기도 전에 흩어진 그의 말들(2020년 7월~2024년 7월 한겨레 연재 ‘호준과 호이준 사이에서’ 취재 기록)을 찾아 모았다. 그 말들에서 확인되는 ‘슬프지만 벅찬 변화’를 그의 소멸에도 흠집 하나 없는 ‘우리나라’는 끝내 읽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2020년 6월16일 (태완은 본래 명랑하고 활달한 아이였다.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까르르 웃는 개구쟁이였고, 비장한 표정으로 기합을 넣는 ‘태권소년’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십대였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뒤 주눅 든 성인이 됐다.) 저는 태완이에요. ‘프렙’ 어쩌고 하는 몽골(6살 때 엄마 따라 한국 입국) 이름은 외우지도 못해요. 이메일과 포털 사용하느라 빌려 쓰는 이름(지인 이○○)도 있지만 저는 무조건 강태완이에요. 제게 몽골은 ‘엄마 나라’일 뿐이에요. (단속의 공포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려온 그는 ‘기한 안에 나가면 재입국 기회를 부여한다’는 법무부 정책을 믿고 이날 자진 출국을 신고했다.)
6월19일 ‘당연히 한국인’인 줄 알았어요. 똑같은 교복을 입으니까 고등학생(강제퇴거 유예) 때까진 친구들과 똑같다고 믿었어요. 그땐 엄마의 지친 표정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졸업하고 학교 밖으로 나오니까 엄마가 왜 날마다 힘들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람 만나는 게 싫어졌고 상대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참았어요. 집에 돌아오면 늘 기진맥진했어요. 친구들과도 멀어졌어요. 친구들은 양복 차려입고 부모님이 사 준 차 끌고 모임에 오는데 이삿짐 일 끝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저는 땀, 먼지, 상처투성이였어요. 왁자지껄 신나는 분위기에서 저만 아무말도 못했어요. 고등학생 때 야자 빼고 같이 놀러다니던 애들이 졸업 뒤엔 어느 누구도 저처럼 살지 않았어요. 박탈감이란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게 됐어요.
6월24일 긴장해서 잠을 못 잤어요. 석달 전 회사 그만둘 때 사장님이 ‘퇴직금은 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2011년부터 9년간 근무한 회사 대표에게 퇴직금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몽골에서 지낼 생활비와 귀국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퇴직금은 받아야 했다.) 일하면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항의를 못 했고요. ‘우리 공장에 불법 애 하나 있다’고 신고하면 어쩌나 겁이 났어요. 할 일이 생기면 제가 나서서 했어요. 하나라도 더 하면 뭐라도 인정해줄 줄 알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어요. 모두의 ‘호구’가 됐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 몸에 무리가 왔어요. 참기만 하다 보니 화병이 생겼어요. 목이 뻣뻣해지고, 손이 떨리고, 눈이 충혈됐어요. 한때 엄마를 원망했어요. 모든 게 엄마(의 미등록 신분) 탓이라고요.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해요. 빨리 재입국해서 엄마를 돕고 싶어요. (이날도 결국 태완은 회사 대표에게 퇴직금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동행한 기자가 고성의 격한 언쟁을 벌인 끝에 대표는 ‘얼마를 받기 원하냐’고 태완에게 물었다. 20일 뒤 태완은 퇴직금의 80%에 해당하는 돈을 받았다.)
9월8일 빨리 나가야 하루라도 빨리 돌아올 텐데 답답해요. (코로나 팬데믹으로 출국 비행기표가 잇따라 취소됐다.) 자꾸 미뤄지니까 자꾸 마음이 약해져요. 출국신고를 무를 수도 없고,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어요.
2021년 3월8일 6급 나왔습니당. (태완이 300점 만점에 258점을 받은 한국어능력시험 성적표를 에스앤에스 대화방(태완과 그의 체류자격 취득을 돕는 이주와인권연구소 연구위원 김사강, 아시아의창 소장 이영아, 기자 이문영)에 올렸다. 최고 등급이었다. 출국이 기약 없이 연기되면서 태완은 2년제 대학 진학 준비를 국내에서 시작했다. 외국 국적의 응시자는 한국어능력시험 점수를 제출해야 했다.)
7월9일 나가면 확실히 돌아올 수 있어요? 아니면 어떡해요. 다 포기하고 싶어요. (14번째 출국 일정이 잡혔다. 신고 1년 만에 겨우 출국하게 된 태완은 많이 불안해했다.)
7월15일 공항에 도착하지 않으면 좋겠어요. (공항 가는 길에 태완이 김사강에게 말했다.) 그냥 이 도로 끝까지 가버리면 좋겠어요. (여행가방을 끌고 탑승장으로 들어가는 태완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는 “23년 전 저 가방만한 애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이젠 저 가방 몇배 크기의 아들을 혼자 보낸다”며 울먹였다.)
8월24일 시설격리는 풀렸지만 자가격리 하듯 지내요. 몽골 말 못하니까 집 밖으로 잘 안 나가요. 낯설고 무서워요. 울란바토르 거리에서 한국 마트와 편의점, 한국 기업 상호들을 확인하자 조금 안심되긴 했어요.
11월10일 너무 추워요. 요즘 가장 따뜻한 시간대가 영하 15도쯤 돼요. 한국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이 그립지만 엄마가 가장 그리워요. 엄마랑 매일 통화해요.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몸이 멀어지니 마음은 엄마한테 더 가까이 가는 것 같아요.
2022년 1월30일 닷새 전 온라인으로 대학 면접 봤어요. 긴장돼서 많이 더듬거렸어요. 지원 이유를 묻길래 “꿈을 꾸고 싶어서”라고 답했어요. 그동안 다 포기하고 지냈는데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는 삶을 살고 싶다고요. (2월8일 합격 통지가 왔다.)
2월26일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비자가 나왔다. 90일짜리 단기비자에 불과했지만 재입국의 길이 열렸다. 대화방에 소식을 올린 태완이 평소 쓰지 않던 ㅋㅋ를 남발했다.)
3월2일 교수님이 ‘외국인 맞냐’며 당황해하시더라고요. (학교 개강 첫날 태완은 비대면으로 출석했다. 외국인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문법 수업이었다.) 말하는 거 보면 완전 한국인인데 수업 듣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면서요. 다른 학생들한텐 모르는 거 있으면 ‘타이왕’ 형·오빠한테 물어보라셨어요. 이젠 강태완으로 불릴 일도 없겠죠?
3월3일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는데, 되게 신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힘드네요. (재입국을 하루 앞두고 태완은 심란해했다.) 몽골 올 때랑 비슷한 기분이에요. 돌아가면 부딪혀야 할 일들이 그려지니까요. 너무 오래 ‘불법체류자’로 살다 보니 불안에 익숙해졌나 봐요. 한국에서 ‘비자 있는 사람’으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엄마를 꽉 안아보는 거예요.
3월4일 아,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외국인이구나. (‘나는 한국인’이라 믿으며 출국했던 태완에게 몽골에서 돌아온 첫날부터 ‘외국인’의 감각이 소름처럼 돋았다.) 공항과 격리 호텔 직원들의 태도에서 확실히 느꼈어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시선과 말투가요.
3월11일 엄마표 떡볶이를 먹었어요. (격리에서 해제된 태완이 출국 240일 만에 엄마를 만났다.) 옛날부터 엄마가 만든 떡볶이에선 신기하게 몽골 맛이 났어요. 그 떡볶이를 입에 넣자 비로소 ‘돌아왔구나’ 싶었어요.
3월15일 차라리 아무도 말 안 걸었으면 좋겠어요. 그림자처럼 다니다 졸업하려고요. (태완이 첫 대면 등교를 했다. 동기들보다 10살이 많은 태완은 학교생활도 긴장과 걱정을 가득 안고 시작했다.)
6월26일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걱정했나 봐요. 친구 만들지 않고 공부만 하겠다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고민이었어요. (태완이 1학기 성적 전 과목 에이플러스(A+)와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태완의 말에서 처음으로 자신감이 비쳤다. 보상 없는 노력에 절망해온 태완이 노력의 결과를 받아 들고 조금씩 가슴을 폈다.)
6월29일 소주 한잔하실래요? (자진출국 신고 2년 만에 유학비자가 발급됐다. 그토록 원하던 ‘신분증’을 출입국·외국인청에서 받아 나오는 순간 태완의 표정이 마법처럼 달라졌다. 공공기관을 찾아갈 때마다 극도로 경직됐던 그에게 느슨한 여유가 피어났다. ‘존재 증명’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 태완은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하하. 신기하게도 두려움이 사라지네요. 이제 눈치 덜 보며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태완은 우선순위를 정하느라 생각이 바빴다.) 병원에 한번도 못 가봤는데 치과부터 가야겠어요. 충치를 오래 참았거든요. 운전면허는 아무래도 1종이 좋겠죠? 아, 당장 휴대폰부터 개통해야겠네요. 은행 계좌와 신용카드 만들려면요. 온라인 쇼핑도 해봐야겠어요. 오늘은 제 인생의 뜻깊은 날! 앞으로 계속 기념해야겠어요. 진짜 너무 좋아요.
11월16일 공부 재미가 없어졌어요. (흥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취업 상담이 시작되자 태완은 다시 위축됐다.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학교가 그에게 소개하는 일자리는 대학 공부가 굳이 필요 없는 단순 생산직들이었다.) 하고 싶은 일(개발자)은 생겼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저를 원하는 회사가 없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노력하는 만큼 나아지리란 믿음이 있어야 사람이 버틸 수 있잖아요. 국적이 뭐길래 저를 이렇게 꽁꽁 묶나요. 제가 한국인이었다면 훨씬 더 잘 살았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어요. 이 생각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예요. 앞날이 까마득해요.
2023년 2월10일 평생 잊지 못할 장학금입니다! (이영아가 소개해준 ‘전태일이소선 장학금’(배움의 의지가 강한 노동자와 청소년 대상)의 수혜자 중 한명으로 태완이 선정됐다.) 의미 있는 장학금 받게 도와주셔서 너무 좋아요. (장학금을 받은 뒤 태완은 ‘전태일 평전’과 ‘전태일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사서 읽었다.)
11월19일 전북 김제의 고소차·굴착기 회사에서 면접을 보고 왔어요. 집(경기 군포)에서 많이 멀지만 인구소멸지역에서 5년 일하면 ‘지역특화형 거주비자’란 걸 받을 수 있대요. 기간을 채우면 영주권 신청 자격을 준다고요. (태완은 이 회사에 연구직으로 지원했다.) 직종 선택 이유를 묻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어릴 때 장난감 해체해서 조립하는 걸 좋아했다”며 횡설수설했어요. 체류 자격에 대해선 따로 안 물으셨는데 차라리 그 질문이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자진 출국 신고 때부터 하도 많이 받은 질문이라 익숙하거든요.
2024년 3월20일 이틀 전부터 김제에 내려와서 일하고 있어요. 출근 첫날 회사 정문 통과하는데 너무 떨려서 ‘괜히 연구원 지망했나’ 후회했어요. 차라리 오래 알바했던 생산직으로 돌아가는 게 나았을까요? 발전하고 싶은 욕심에 제게 벅찬 일을 택한 건 아닐까요? (그는 여전히 불안해했다. 회사 작업복엔 강태완 대신 ‘푸렙체렝 타이왕’이란 이름이 새겨졌다.
4월3일 제가 개발팀 막내인데요. (먼 길을 돌아온 태완은 ‘나이 많은 막내’였다. 태완의 사수도 그보다 나이가 어렸다.) 회로 설계하고, 코딩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하고, 오류 나면 수정하는 일을 해요. 학교에서 배운 건 기초 중 기초더라고요. 공부할 게 너무 많아요. 일 끝나면 사무실이나 기숙사에서 혼자 코딩 연습해요.
5월14일 수학 못 해도 자동차 쪽 일 할 수 있으니 포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전북 정읍에서 찾아온 스리랑카 국적의 남매에게 태완이 조언했다. 태완처럼 국내 미등록 이주아동으로 살다 체류자격을 받은 남매를 김사강이 소개했다. 이주아동 후배들에게 태완의 좌절과 도전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중요한 참고서’였다. 자동차를 좋아하지만 수학 성적이 안 좋아 고민이라는 둘째에게 태완은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며 용기를 줬다. 태완은 후배들 발에 걸릴 돌부리를 앞서 캐내는 선배로 성장하고 있었다.) 2천만원씩 통장에 모아두라고 하려다 애들한테 차마 그말까진 못했어요. (국내 대학들은 외국인 응시자들에게 최소 2천만원이 예치된 금융자료를 요구했다.)
5월15일 회사 사람들 다 좋아요. 어렵지만 일도 재밌고요. 연구원으로 지원하길 잘한 것 같아요. 배울 게 태산이지만 하나씩 배울수록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루라도 빨리 제몫을 하는 연구원이 돼서 회사에 기여하고 싶어요. (태완은 메신저 프로필에 명함 사진을 올릴 만큼 연구원이 된 자신을 뿌듯해했다. 그리고 이 말을 했다.) 요즘 저 행복해요.
6월4일 세금 떼면 월급이 250만원쯤 돼요. 전부 적금 넣고 잔업 만땅 해서 받는 50만원으로 한달을 살아요. 통장도 못 만들 땐 그달 벌어 그달 다 썼지만 이젠 장기 계획을 갖고 싶어 모두 저축해요. 3년 안에 1억 모으는 게 목표예요.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의지는 확고해요. 세금 내는 사람이 돼서 기분 좋아요. 연차도 12개 생겼어요. 제게도 ‘희망’이 생긴 것 같아 하루하루 설레요. (체류 자격이 없어 ‘꿈꿀 자격’도 없던 태완이 그를 취재한 4년 동안 처음 보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6월25일 ‘지역특화형 거주비자’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10월19일 (태완이 법무부 ‘미등록 이주아동 한시적 구제대책’의 내년 3월 종료를 앞두고 ‘대책 연장과 상시화’를 촉구하는 캠페인 영상을 촬영했다. 촬영 뒤 대화방에 인사를 남겼다.)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11월8일 (태완이 사망했다. 시험 테스트 중이던 텔레핸들러에 떠밀려 압착됐다. 함께 테스트를 진행했던 동료 연구원이 현장에서 들은 그의 말을 어머니에게 전했다. 사고 직전까지 리모컨을 조작했던 태완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안 돼요. (그의 죽음이 조작 실수 탓인지 기계·신호 결함 등으로 조작이 ‘안 된’ 탓인지는 수사로 규명돼야 한다.)
12월16일 (사망 38일 만에 태완이 화장됐다. 겨우 자격을 얻었으나 ‘미처 말해지지 못한 말들’까지 불타 재가 됐다. 장례식장 빈소 한쪽 벽엔 태완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성인 태완’한테 보지 못했던 표정들이 어린 태완의 얼굴에 있었다. 장난기 많고, 웃음도 많고, 친구들도 많은 태완이 사진 속에서 반짝였다. 죽고 난 뒤에야 태완이 그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가진 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그에게서 빼앗은 얼굴이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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