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 보르네오섬 서부 여행① 코타키나발루에서 여행의 감각을 깨우다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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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섬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으로 말레이제도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세 나라의 영토로 나뉜다. 이 섬의 유명 관광지로 대표되는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를 출발점으로 보르네오섬 서부 여행을 시작했다. 작지만 알찬 이 도시에는 먹고 보고 즐기는 여행의 3요소가 균형 있게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의 크고 작은 소음을 따라
자정이 다 된 시간, 홀로 낯선 공항에 발을 들이는 건 아무리 여러 번 경험해도 익숙지 않은 일이다. 가급적 이런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지만 내 뜻대로 비행기 운항이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인천발 동남아행 비행기는 죄다 사정이 비슷하다. 인천공항에서 저녁시간쯤 출발한 비행기가 5~6시간을 이동해 자정쯤 목적지에 도착하면 그곳에서 다시 승객을 태우고 밤새 인천으로 날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인천발 동남아행 비행기의 스케줄이다. 인천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기내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일출과 동시에 달콤한 휴가에서 벗어나 현실세계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공항에 이제 막 발을 들이며 여행의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 너머로 휴가의 막바지 인천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며 아쉬운 표정이 역력해 보이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순간, 단박에 공항 규모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도착’과 ‘출발’이 유리창 하나로 나눠져 있는 걸로 봐서 입국심사, 짐 찾기 등을 거쳐 택시 승차장까지 머릿속으로 계산해본 이동시간은 짧다. 한데 그래 봤자 자정이 다 된 시간을 대낮으로 바꿀 수는 없는 현실이다.
코타키나발루 국제공항은 도심과 불과 7~8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차로 15~20분 거리다. 공항이 생활권에 자리해 있다 보니 비행기 소음이 거의 자동차 소음 수준마냥 생활화되어 있는 양상이다. 공항이 지척이라고 크게 체감한 건 다음날 호텔방 창문을 통해 날아가는 비행기의 몸체가 눈에 뚜렷하게 담겼을 때였다. 게다가 몸체를 통해 어느 항공사의 비행기인지 단번에 파악이 가능할 정도였다. 이곳 현지인들에게는 날아가는 비행기의 몸체를 확인하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얘기겠지만 이방인에게는 볼수록 신기하고 특별한 경험이다.
창문 앞에서 목을 뒤로 젖힌 채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비행기의 잦은 출현이 반가웠다가 이내 위기감으로 바뀌었다. 하늘을 숱하게 가로지르며 휩쓸고 간 비행기의 흔적을 생각하면 지구 환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런 생각도, 생활권에 들어선 공항의 특별함도 며칠 지나고 나서부터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현지인처럼 비행기 소음에 어느새 적응이 되어버린 까닭이다.
산의 도시, 도심 속 하이킹
보르네오섬의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주도다. 코타키나발루(Kota Kinabalu)에서 ‘코타(Kota)’는 도시를 의미하고 ‘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최고봉 키나발루산을 지칭한다. 이 도시는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1967년까지 찰스 제셀(Charles Jessel)경의 이름을 따서 ‘제셀톤(Jesselton)’이라고 불렸는데, 현재 이 명칭은 코타키나발루 주변 섬을 잇는 주요 선착장의 항구 이름으로 남아 있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가 자리한 본토와는 달리 동말레이시아로 지칭되는 사바 주 그리고 주도인 코타키나발루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다른 나라로 인식되었다.
본토보다 오히려 보르네오섬을 공유하는 사라왁 주나 주변 국가인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등과 비슷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도 본토는 이슬람 문화권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 사바 주는 전체 인구의 30~40%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토착인종 등의 소수민족이 차지하고 있어 이슬람교와 더불어 불교, 기독교, 가톨릭 등 종교의 다양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코타키나발루가 위치한 사바 주의 또 다른 특징은 열대 우림으로 뒤덮인 ‘자연’에 있다. 해발 4,095미터의 키나발루산은 보르네오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지구에서 세 번째로 높은 섬의 봉우리다. 산 정상 인근에는 고산기후로 인해 겨울추위가 나타날 정도로 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기후와 지리적 특징을 보인다. 키나발루산은 여러 수식어가 붙은 만큼 등산애호가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장소인데, 사실 외국인의 등반 허용에 있어서 꽤 까다로운 편이다.
전문 가이드와 동반은 필수인 데다, 다소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가이드를 예약하더라도 하루에도 여러 번 급변하는 날씨 탓에 등산로 폐쇄가 잦은 것이 그 이유다. 하늘이 맑고 화창한 날에는 코타키나발루 도심에서 키나발루산을 조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장소가 공항과 멀지 않은 ‘부킷 코푼깃 하이킹 트레일(Bukit Kopungit Hiking Trail)’이다.
도심에서 남쪽으로 차량이 많이 다니는 500번 도롯가에 트레일 시작점이 있다. 관광지라기보다 현지인들이 아침, 저녁 운동 삼아 등산을 즐기는 코스에 더 가깝다. 낮에는 동네 어르신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사랑방 같은 장소기도 하다. 시작점 주변에 1번부터 3번까지 하이킹 코스 지도가 나무에 붙어 있는데, 공식적으로는 3개지만 샛길이나 지름길 등 현지인만 아는 길까지 합치면 그 수가 열 개도 넘는다고 한다. 우기 시즌 많은 비가 내리고 나면 길이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이 생겨나기도 한다는 것.
부킷 코푼깃 하이킹 트레일은 매일같이 이곳을 오르내리는 주민들에 의해 100% 관리 및 유지된다고 한다. 그만큼 주민들의 자부심이 상당히 뿌리내린 곳이다. 번잡한 도심에서 살짝 벗어나 짧은 탐험을 즐기기에 제격인 장소다. 정상에서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전망과 저 멀리 작게나마 느껴지는 키나발루산의 위용, 여기에 공항 활주로에서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의 몸짓과 소리까지 눈과 귀로 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군대에 의해 지어졌다는 동굴과 터널은 하이킹 코스 중 하나지만 현재 정글 숲으로 뒤덮여 있어 접근이 불가능해 아쉬움으로 남았다.
매일 밤 눈과 입의 호사, 시장과 먹거리
각 나라나 도시의 여행 난이도를 평가할 때 핵심은 이동거리와 편의시설 여부다. 도시 내 지역을 대부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지, 시장이나 식당, 편의점, 카페 등이 곳곳에 잘 갖춰져 쉽게 이용이 가능한지의 여부 등이 난이도를 가르는 기준이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은 쉬워도 너무 쉽다. 주요 관광명소가 도심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기 때문에 이동이 쉽고, 게다가 도시의 밤을 환히 밝히는 야시장만 도심에 서너 개가 위치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문을 여는 주얼리 및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시장, 현지인을 대상으로 신선식품을 판매하는 중앙시장, 해산물을 즉석에서 조리해 판매하는 먹거리시장, 주말에만 문을 여는 야시장 등 규모가 작은 도시에 여러 개의 시장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풍경이 다채롭게 느껴진다. 시장은 도시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장소다. 코타키나발루에서는 그 역할이 더욱 강하다.
이곳의 전통시장은 역사적으로 보르네오섬의 생명선이라고 불렸다. 오랜 세월에 걸쳐 지역 농부와 어부, 행상인들이 매주 도심에 모여 서로의 물건과 음식을 나누었고, 주민들 사이에서 일상의 담소가 오가며 삶을 이어온 장소다. 이를 ‘타무(Tamu)’라고 칭한다. 말레이시아어로 큰 시장을 뜻하는데, 타무 관습은 고대부터 이어져 현재에도 도시의 생명선을 담당한다. 태국이나 베트남, 라오스 등 여러 동남아 국가의 많은 시장을 다녀봤지만 이곳처럼 어느 시장에 가더라도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번잡하고 분주한 모습은 처음 맞닥뜨렸다.
나 역시 코타키나발루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밤이면 발걸음은 자연스레 야시장으로 향했고, 현지인들 사이에 껴서 저녁식사를 해결하곤 했다. 메인디시부터 디저트나 과일 등 야시장에서 워낙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판매하기 때문에 매일 저녁으로 뭘 먹을지 선택하는 데 꽤 고민을 쏟아야 했다. 그 수많은 먹거리 중에서 딱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생선구이다. ‘토닥 워터프론트 호커 센터(Todak Waterfront Hawker Center)’에서 맛본 생선구이는 별 다섯 개를 줘도 모자라다.
일단 한국의 시장 물가를 감안하면 생선을 맛보기도 전에 이곳의 저렴한 생선값에 먼저 마음이 동한다. 갓 잡은 다양한 종류의 신선한 생선뿐 아니라 꽃게, 랍스터, 조개, 오징어 등 해산물 천국이 따로 없다. 비릿하고 짠 내음이 사람에 따라 호불호를 가르지만 분명한 건 해질녘 한가로운 해안가 풍경은 보는 맛과 함께 해산물에 감칠맛을 더한다는 사실.
이곳 시장의 또 다른 장점은 손님이 원하는 맛에 따라 소스나 재료, 조리법을 선택해 그에 맞춰 조리를 해준다는 것. 그릴에 노릇노릇하게 구운 생선 위에 매콤한 소스를 더하면 밥 두 공기가 게눈 감추듯 뱃속으로 사라진다. 이 생선구이 맛 때문에 코타키나발루 재방문 의사는 1만%. 시장투어와 먹거리에만 집중해도 코타키나발루 여행은 어느 정도 양질의 결과물로 채워진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몰을 바라보며
수치상으로 보면 코타키나발루 인구의 약 20%가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라고 하는데, 체감상 느껴지기로는 절반 이상쯤 되는 것 같다. 어느 장소를 방문하더라도 중국인 관광객이 하도 넘쳐나는 도시라, 관광지에서는 현지 언어보다 중국어가 더 강하게 들리고 도심 곳곳에서 한자로 쓰인 간판 또한 쉬이 찾아볼 수 있다. 관광지를 방문할 때마다 크고 작은 차이나타운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기분이다. 머무르고 있던 호텔에도 70~80% 정도가 중국인 관광객이었는데, 특징이라면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연령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했다. 그리고 이들 대다수가 언급한 코타키나발루를 찾은 이유는 바로 ‘일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판 인스타그램으로 불리는 ‘샤오홍슈’에서 최근 들어 인기 게시물로 각광받는 것이 코타키나발루의 일몰 사진이라는 것.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중국인들은 일몰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이를 배경 삼아 제대로 된 인생사진을 남기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코타키나발루는 세계에서 가장 일몰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남중국해를 따라 서쪽으로 해안선이 있는 이 도시는 그리스 산토리니, 미국 하와이와 함께 ‘세계3대 석양’ 중 하나로 꼽힌다. 맑은 저녁에는 하늘이 불타오를 듯 오묘한 빛깔의 진한 붉은 빛이 바닷물 위로 마법 같이 반사되어 비추는데 그 장관이 숨막힐 듯 펼쳐진다고 알려져 있다.
일몰 감상은 관광객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도 최고의 즐길 거리다. 보고 또 봐도 놀라운 일몰 풍경은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최고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일몰 명소답게 도시 곳곳에는 해넘이의 진가를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도심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그날 힐(Signal Hill)과 해안가 주변에 마련된 여러 곳의 전망대, 도심에서 남쪽으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탄중아루(Tanjung Aru)해변 등이 대표적이다.
한데 며칠째 날씨가 말썽이다. 제아무리 세계 최고의 일몰 명소라고 해도 날씨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저 허울뿐이다. 여행 첫날부터 사흘 연속 굵은 빗방울과 커다란 구름 떼가 하늘을 뒤덮어 일몰의 기운을 전혀 느낄 수 없었는데, 대망의 그 기운이 나흘째 되던 날 찾아왔다.
구름 잔뜩 낀 오전시간이 지나고 낮부터 쾌청한 하늘을 회복하더니 일몰시간이 가까워올 무렵 한층 선명해진 푸른 하늘은 모두의 염원을 담고 있는 듯 보석처럼 반짝였다. 이후 빨갛게 달아올라 마치 커다란 불길이 솟아날 것만 같은 강렬한 기세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고, 그 뜨거운 기운에 압도되어 일순간 두 눈에 눈물이 맺혀 버렸다. 감동의 눈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신비로워 그 표현이 한없이 부족하다.
말로 표현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작가로선 참으로 고역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다. 그래서 이를 직접 보겠다고 앞다퉈 코타키나발루를 찾는 건 아닐지. 긴 하루의 끝에서 이토록 신비로운 기운을 오롯이 품을 수 있다면 내일의 하루는 결코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다.

[글과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969호(25.03.04)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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